Column

노블레스 오블리주

“오늘 밤 기대 많이 하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혹시 불편하신 점 있으시면 무엇이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70대의 노신사는 손자뻘 되는 무명 연주자가 꾸미는 작고 소박한 음악회에 찾아와 등을 두드려 주는 격려 대신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하고 조용히 연주자 대기실을 떠났다. 1990년대 후반 서울의 한 작은 콘서트홀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날 음악회 반주를 맡았던 피아니스트 A는 서울의 한 음대에서 공부하던 20대 초반의 대학생이었다. 당시 그 음악회를 주최했던 곳은 국내 굴지 대기업이 사회 공헌을 위해 세운 문화재단이었는데, 평소 음악을 좋아했던 그 기업의 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그는 세계적인 음악가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음악회를 열었고, 재능있는 젊은 연주자들을 발굴 육성하는데 앞장섰던 금호 아시아나 그룹의 고(故) 박성용 전 회장이다. 지독한 클래식 음악 애호가였던 그가 한국 음악계에 끼친 영향은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는 금호문화재단과 예술의전당 이사장을 맡으며 한국 기업 메세나 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또한 단발성 인재 발굴이 아니라, 그들이 성장하여 실제로 무대까지 설 수 있도록 꾸준히 후원했다. 지금 클래식 음악계를 호령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손열음, 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 이유라, 김혜진 등이 바로 그 수혜자들이다. 재단에서 유명 악기들을 구매하여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연주자들에게 무상으로 대여해주는 일을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작곡가 윤이상을 기념하는 통영국제음악제를 오늘날의 위치로 자리매김 할 수 있도록 초석을 놓은 인물도 바로 박 회장이다. 

여기 또 다른 기업가를 소개한다. 필자의 대학 시절,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함께 활동했던 챔버 오케스트라가 일본의 한 국제 음악제에 초청을 받은 적이 있다. 우리 단체를 비롯하여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오케스트라, 챔버 오케스트라, 그리고 합창단들이 참여했는데 음악제 기간에 각 단체들은 일본 서부지역 몇 개 도시에 흩어져 연주할 기회를 가졌다. 그 중 음악제의 하이라이트는 모든 참가 단체들이 함께 꾸미는 연합 콘서트로 유명 지휘 콩쿨에서 입상했던 젋은 일본 지휘자의 리더십 아래 참여하는 연주자들 숫자만 하더라도 300명이 넘었다. 그런데 실제 공연의 지휘봉을 잡은 사람은 몇일 동안 함께 리허설을 이끌었던 그 젊은 지휘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 소니의 회장, 고(故) 오가 노리오(大賀典雄)였다. 

오가 회장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케스트라를 통째로 빌려 연주하기도 하고 녹음까지 했다. 당시 이 음악제를 위해 뒤에서 조용히 후원을 맡았던 오가 회장은 도쿄 예술대학에서 성악을 공부했고, 2년의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 후 자신을 후원해 준 회사에 입사하여 총수의 자리까지 올라가게 된 입지적인 인물이었다. 특히 베를린에서 열린 소니센터 개소식에서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하는 모습으로 그의 존재감을 전 세계에 알렸다. 가전제품의 명가이자 워크맨의 중흥을 이끌었던 소니가 문화 컨텐츠 기업의 선봉에 우뚝 설 수 있도록 기반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은 컨텐츠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영화와 음악 시장을 선점하도록 만든 오가 회장의 통찰력 때문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고 즐기는 수준을 뛰어넘어 집착에 가까운 열정을 보였던 그였기에 다른 사람이 보지 못했던 시장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경영 현장에 있을 때도 일본에서 열린 각종 국제 콩쿨과 페스티벌을 지원했던 것은 물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받게 된 퇴직금 전액 16억엔을 나가노 현의 콘서트홀 건립을 위해 쾌척하기도 했다.

오가 회장은 필립스와 공동으로 개발하던 CD가 60분에서 75분이 될 수 있도록 크기를 늘리도록 제안했다. 이유는 그가 제일 좋아하는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한 장의 CD에 담아낼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였던 박성용 회장 역시 중학교 시절 베토벤의 6번 교향곡 <전원>의 전곡을 접하게 되었고, 음악 다방에서 두세 시간 씩 음악을 들으며 학창시절을 보냈을만큼 오랜 옛날부터 시작된 그의 음악 사랑이 오늘날까지 영향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이계안의 저서 ‘누가 칼레의 시민이 될 것인가?’라는 책에서는 14세기에 있었던 사건 하나를 소개한다. 백년전쟁 당시 영국 왕 에드워드3세는 프랑스의 칼레를 점령했다. 극렬하게 저항하는 칼레 시민들을 몰살하려 하자 에드워드 3세는 칼레 시민들의 생존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교수형에 처해질 시민 대표 6명을 뽑아오도록 요청했다. 칼레 시민들이 고민에 빠져있을 때 생 피에르(St Pierre)가 희생양을 자처했다. 그는 칼레의 가장 큰 부자였다. 그가 나서자 시장, 법률인 등의 귀족들이 교수형에 동참하기로 했다. 모두를 위한 죽음을 선택한 여섯 명의 희생정신에 감복한 에드워드 3세는 교수형을 중단하였고 결국 모두 살아남게 되었다. 이는 ‘사회 지도층’이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더 큰 책임이 요구된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모형이 되었다. 

비행기 안에서 컵라면 한 그릇으로 전 국민의 공분을 샀던 모 대기업 임원에 이어, 땅콩을 봉지포장 그대로 대접했다는 승무원을 향해 비인격적이고 안하무인의 극치를 보였던 기업가의 어이없는 해프닝을 우리는 목격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잃어버린 지도층이 득세할 때 사회가 어떻게 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반면 어린 시절 들었던 베토벤 교향곡을 따라간 두 인생이 세상에 어떤 여운을 남기고 있는지도 보게 된다. 필자는 박 회장이나 오가 회장들과는 개인적 친분도 없고 그들 인생의 또다른 면을 알지도 못한다. 그러나 무명의 청년 피아니스트에게 허리를 굽히는 겸양의 덕을 갖고, 세상을 빛내는 일에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앞장섰던 ‘사회 지도층’이라면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존경과 감사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