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그래봤자 노래, 그래도 노래

“니가 김동민이가?”
진한 대구 사투리를 쓰는 Y를 알게 된 것은 1998년, 처음 유학생활을 시작했던 그해 가을 Y는 유학 3년차 였다. 초면부터 반말을 걸어왔으니 첫인상이 좋았을리 없다. 전공이 성악이니 앞으로 별로 엮일 일이 없을 것 같아 크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그 이후 학교나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나면 고개만 까딱하는 가벼운 인사 정도로 적당한 거리를 뒀다.

학교 오페라 극장은 한 해 8편의 오페라 작품을 올렸다. 이 중 평균 두 편 정도의 테너 주역을 할만큼 뛰어난 한국 유학생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주인공은 공교롭게도 Y였다. 토종 대구 사투리를 들어보면 영어 한 마디 못할 것 같은 분위기에 아저씨 스타일의 인상을 보면 <나비부인>에 등장하는 중매쟁이 ‘고로’ 역할에 제격같아 보였다. 그런데도 대체 노래를 얼마나 잘하길래 그 멋지다는 테너 주인공을 줄줄이 꿰찬다니… 실제로 Y는 출연했던 여러 오페라의 주역을 성공적으로 해내며 뚜렷한 존재감을 나타냈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극장보다 3인치 더 넓은 무대를 가졌다는 학교 오페라 극장은 유명 가수들을 길러낸 산실이라는 자부심과 전통을 가진 곳이었다. 특히 좋은 테너 없이는 올릴 수 없는 <호프만의 이야기> 같은 작품을 Y라는 테너 덕택에 마음놓고 계획할 수 있었다. 직설적이고 까칠한 성격인줄로만 알았는데 그는 정작 속 깊고 정 많은 사람이었다.

몇 년 동안 Y를 잊고 지내던 2000년대 후반, 믿기 어려운 소문이 들려왔다. 열심히 활동하고 있을 줄 알았던 그가 공사장 인부로 일한다는 소식이었다. 선뜻 전화를 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만일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연락을 받고 싶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또다른 소문도 있었다. 괜찮은 매니저를 만나 미국 내 중소 오페라 극장에서 주역으로 활동한다는 내용도 있었고, 메트 오페라 합창단으로 활동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몇 년 전 불어 닥친 미국의 경제 위기 때문에 오페라 시장은 거의 붕괴 수준에 다달았다. 워낙 거대 자본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중소 규모 오페라 극장들은 재정 한파의 직격탄을 맞아 아예 문을 닫거나, 그나마 계획했던 작품 숫자를 줄이는 현상이 도미노처럼 이어졌다. 이는 오페라 신인들에게 딛고 시작할 발판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가수가 노래할 극장이 없어졌으니 제아무리 유능한 매니저라고 속수무책이 되었고 자연히 계약도 유명무실해졌다. 이 무렵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Y는 가정집을 방문하면서 전화선과 인터넷을 설치해주는 V통신사의 엔지니어 일을 소개 받아 7년 동안 일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는 법이지만, 한 길을 걸어왔던 Y에게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실망은 했을지언정 절망하지는 않았다. 기회가 생길때마다 음악회를 가졌다. 무대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예전처럼 오페라의 주역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늘 그랬듯이 Y는 음악 앞에서 진지했다.

지난 주말 메트 오페라에서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오픈 리허설 티켓이 생겼다. 바그너의 작품 중 유일한 희곡이고, 연주 시간이 6시간 밖에 되지 않는 비교적 짧은(?) 작품이었다. 게다가 제임스 레바인의 지휘하는 바그너라니! 그가 이끄는 마지막 바그너가 될 지도 모를 공연이었기에 티켓은 진작 매진되어 뜨거운 관심을 짐작케 했다. 그런데 필자의 마음을 들뜨게 했던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Y가 이 작품에 출연하기 때문이었다. 주인공으로? 물론 아니다. 조연도, 단역도 아니다. Y가 맡은 역할은 마지막 30분 정도에 출연하는 합창단 중 한 명이었다. 아빠가 노래하러 다니는 걸 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사춘기 큰 아들은 아빠의 꿈을 이해하고 지원할 수 있을 만큼 멋지게 자랐다. Y는 리허설에 참여하기 위해 매릴랜드에서 뉴욕까지 수없이 오고 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가 하던 일도 잠시 중단했다. 그렇게 해도 괜찮냐고 물으면 노래할 기회가 계속 생기길 바라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다시 V통신사에서 케이블을 깔면 된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했다. 그의 넉살스런 반응을 보며 최근 화제가 된 한국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1980-90년대 목숨을 걸고 사력을 다해 바둑을 두어 일본 바둑계를 평정했던 승부사 조치훈 9단의 말. 

“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

바둑 한 판 이기고 지는 것, 그래봤자 세상에 아무 영향이 없는 바둑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그 바둑은 조치훈 9단에게는 목숨을 건 전부와도 같은 바둑이라는 말이다.

기다리던 3막 2장의 막이 올랐다. 저 성악가들을 어떻게 다 모았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인원이 화려한 무대에 꽉 들어찼다. 150명은 족히 될 것 같은 합창단원 중 다행이 그가 선 곳은 객석과 마주한 제일 앞 자리, 몇 년 전 수백 명의 경쟁을 뚫고 섰던 메트 오페라 전국 오디션 본선 무대 바로 그 자리였다. 그런 Y가 지금은 합창의 일원으로 노래하고 있었다. 그는 화려하지도 않았고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가 선 무대는 여전히 고귀했다. 인생이며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Y의 노래가 가장 빛나던 이유였다. 

“그래봤자 노래… 그래도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