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파보의 미덕

요즘 대세가 누구냐 묻는다면 주저 없이 꼽고 싶은 사람이 있다. 바로 에스토니아 출신의 지휘자 파보 예르비(Paavo Jarvi)다. 현재 가장 바쁜 일정과 연주를 소화하는 지휘자 중 한 명으로 전 세계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은 없다. 그는 음악가 집안 출신으로 명 지휘자로 잘 알려진 아버지 네메 예르비와 동생 크리스찬 예르비와 더불어 세계 지휘계를 ‘접수’하고 있다. 최근 10년간 음악감독으로 이끌었던 신시내티 심포니를 명실상부한 미국의 대표 오케스트라로 성장시켰고, 독일과 프랑스의 주요 악단을 비롯해 최근에는 일본의 NHK교향악단의 수장에 오르며 그의 주가를 확인시켜 주고있다. 

2004년부터 음악감독직을 맡아온 도이치 캄머 필하모닉과 함께 소니를 통해 출반한 베토벤 교향곡 전곡은 오늘날의 화법을 담은 명반으로 평가되고 있다. 베토벤의 작품을 혁명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일리가 있다고는 하지만 지난 200여 년 동안 세계 각지에서 마르고 닳도록 연주되었다. 명반으로 꼽히는 한 둘을 제외하고는 ‘그 놈이 그 놈’인 셈인데, 유독 그가 지휘하는 베토벤은 다르다는 평가가 세계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브루크너, 말러, 슈만, 닐센 교향곡 전곡을 녹음하면서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권위있는 음악상을 휩쓸고 있다.

오케스트라는 연주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동체다. 이를 구성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차적 목표는 좋은 음악을 만드는 것이다. 오케스트라 구성원들 모두 연주를 통해 소리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단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지휘자다. 소규모 앙상블이나 챔버 오케스트라 중 지휘자 없이 연주하는 곳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지휘자는 단체의 일차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연주 대신 듣는 일에 집중한다. 그렇다면 지휘자는 음악을 제대로 듣는 사람이어야 함과 동시에 자신이 들은 것을 바탕으로 함께 악단을 이루는 다른 사람들과 잘 소통해야 한다. 이 두 가지를 잘 하는 지휘자는 좋은 리더의 기본 조건을 만족한다고 말할 수 있다.

2005년 필자가 오스트리아 한 재단의 초청으로 짤스부르크와 빈에 약 두 달 여간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당시 막 음악감독직에 올랐었던 파보가 이끄는 도이치 캄머 필하모닉의 공연이 있어서 관계자의 허락을 얻어 연주 직전 무대 리허설을 찾아갔다. 그날 저녁 무대에 올려질 곡목은 교향곡 8번과 피아노 협주곡 4번, 모두 베토벤의 곡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파보를 네메 예르비의 아들 정도로만 알고 있던터라 그에 대한 궁금증 보다는 독일의 챔버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베토벤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컸던 것이 사실이다. 

지휘 포디움에 올라 리허설을 진행하던 파보는 자신이 들은 것을 바탕으로 단원들에게 몇 가지 주문을 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관객쪽으로 돌리더니 부지휘자로 보이는 사람에게 소리가 어떻게 들리는지 물어보았다. 부지휘자는 목관악기가 더 선명하게 들리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파보는 그의 의견을 따라 목관악기 연주자들에게 그 부분이 다른 소리들에 묻히지 않도록 신경써서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과정은 리허설 내내 반복되었고, 어떤 부분에서는 한 손으로 지휘를 하면서 고개는 뒤로 돌려 부지휘자의 반응을 살피기까지 했다. 여느 지휘자들처럼 전반적인 사운드가 어떤지 형식적으로 물어보는 차원이 아니었다. 매우 구체적이고 자세하며 엄격한 소통이 일어나는 현장이었고, 이 때 만큼은 부지휘자의 의견을 단원들에게 전하는 메신저에 불과했다. 

성서의 교훈 가운데 ‘믿음은 귀 기울여 듣는 것에서 비롯된다’ 말이 있다. 그만큼 잘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듣기 위해 존재하는 그가 굳이 부지휘자의 귀에 의존했던 이유가 있다. ‘내가 어떻게 연주하고 있는가?’와 그것이 실제로 관객에게 ‘어떻게 들리고 있는가?’에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파보의 미덕은 이 괴리를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내가 하면 모든 것을 잘 듣고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는 알 수 없는 바깥의 소리에도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이를 듣고 싶어하는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파보와 같은 리더가 이 시대에는 더욱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