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젊은 별의 귀환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재키브의 삶과 음악

 

입을 꾹 다문 청년이 한 손엔 바이올린을 들고 힘찬 걸음으로 오케스트라를 가르며 무대 중앙에 섰다. 그는 변함 없이 검정색 셔츠에 제일 윗 단추는 풀었다. 늘 입던 그대로였다. 이곳은 카네기홀의 가장 큰 무대인 스턴 오디토리움.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 앞에서의 데뷔라 더 특별하고 긴장되는 연주이다. 2010년 차이코프스키 협주곡으로 미 서부지역 투어를 함께 하면서 인연을 맺은 미하일 플레트뇨프가 이끄는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와 이번엔 뉴욕 관객을 만났다. 

이날 프로코피에프 바이올린 협주곡 2번으로 호연을 펼친 스테판 재키브(Stefan Jackiw)는 한국에서는 아이돌급 인기를 자랑하는 유명인이다. 그는 미국 수능에 해당하는 SAT 만점을 받아 하버드 대학으로 진학하여 심리학을 전공했다. 아버지 로만 재키브(Roman Jackiw)와 어머니 피소영이 각각 MIT대학과 보스턴 대학 물리학과 교수라니 그야말로 엄친아의 표본이다. 그의 외할아버지가 ‘인연’의 저자 금아(琴兒) 선생이라는 것도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그와의 진땀나는 추억이 있다. 스테판은 필자가 음악감독으로 있는 뉴욕 클래시컬 플레이어스(New York Classical Players)의 상주 연주자(Artist in Residence)로서 모차르트 협주곡 5번을 함께 연주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연주 보름 전 그로부터 이메일이 날아왔다. 팔을 다쳐 연주 일정을 다시 잡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낭패였지만 부랴부랴 곡목을 바꿔 대체 연주자를 섭외하여 연주를 잘 마쳤다. 그리고 스테판과의 연주는 5개월 후로 다시 잡았다. 그런데 연주를 앞두고 그에게 또 이메일이 왔다. 거짓말 같이 똑같은 이유로 이번에도 연주하기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개인적인 섭섭함도 컸지만 비슷한 시기에 그를 초청했을 다른 단체들 역시 낭패였을 것이다. 그런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던 그의 입장을 어땠을까?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와의 미국 투어를 앞둔 그를 만나 이 이야기부터 물었다.

 

다친 팔과 관련해서 이제는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텐데…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가?

2012년에 벌어진 일이다. 센트럴파크에서 러닝을 하던 중 넘어졌는데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 이후 3개월 동안은 계획되었던 연주를 소화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팔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이 몰려왔고, 보스턴에 있는 전문 의사의 처방에 따라 6개월 동안 바이올린을 잡지 않았다. 연습과 연주를 줄이는 것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고 잘못하면 앞으로 평생 바이올린을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진단을 들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치료 과정에서 팔이 아닌 목에 충격이 갔고 그 영향으로 팔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았다. 

 

악기를 쉬던 6개월은 어땠는가?

아마도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어려웠던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악기를 잡지 못했던 기간 동안 전혀 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치료 후 다시 연주가로 돌아갈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의사조차도 조심스러운 입장이었기 때문에 회복에 대한 확신 없이 시간을 보낸다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웠다. 이 기간 동안 평소 호기심을 갖고 있던 부분을 탐구하거나 새로운 걸 배워보면 어떻겠느냐는 주변의 제안도 있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열정을 태울 새로운 동기부여도 없었기 때문이다. 

 

연주 취소와 관련해서 음악계에 좋지 않은 소문이 도는 것에 대한 염려는 없었는가? 

여러 사람과 단체가 엮어 있었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은 문제였다. 당장 잡혀있었던 20여건의 연주를 취소해야 하는 끔찍하고 난감한 상황의 모든 일처리는 매니저의 몫이었다. 그러나 연주를 잡고 취소하는 일은 늘상 있는 일이다. 어떻게 대화하는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행이 지금 같이 일하고 있는 매니지먼트인 오퍼스3(Opus3)는 가족처럼 철저히 나의 입장을 이해했다. 그리고 완전히 회복이 될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해줬다. 

 

다시 악기를 잡을 수 있기까지의 회복 과정은 어떠했는가?

의사의 약속대로 6개월이 지났고 바이올린을 잡기 시작했다. 첫 주에는 하루 2분. 그 다음 주는 4분… 아주 조금씩 연습 시간을 늘려나갔다. 지금은 거의 정상 궤도에 올랐다고 말할 수 있지만 무리하지 않으려고 늘 신경을 쓰는 편이다. 그래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연주를 선별해서 해야했고 자연스럽게 연주를 준비할 물리적인 시간이 늘어났다. 정신적인 여유도 생기다보니 작품을 더 깊이 바라볼 수 있게 되어 결과적으로는 예전보다 더 만족스러운 연주를 하고 있다.

 

음악을 대하는 예술적인 감성은 타고났다고 생각하는가?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 과학자이시다. 그래서 나의 예술적 영감은 몇 년 전 돌아가신 외할아버지(피천득 교수)으로부터 가장 많이 물려 받은 것 같다. 할아버지는 문학자셨지만 클래식 음악을 포함하는 '표현 방식’들에 대한 애정이 크셨던 분이다. 문학작품은 기본이고 그림도 아주 사랑하셨다. 태어나서 12살이 될 때까지 거의 매년 여름 한국에 방문했는데 당시에는 할아버지가 해주시던 말씀을 전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음악을 함께 들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할아버지가 없는 지금의 나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다.

 

혹시 한국 이름은 있는가?

이 이름을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름 방학마다 한국에 놀러가면 조연이라고 부르셨던 것 같다. 피조연. 내 이름이 무슨 뜻인지 잘모르는데, 어머니는 아실지 모르겠다. (웃음)

 

음악 외에 요즘 사랑에 빠져 있는 것이 있다면?

워낙 여행이 많다보니 뉴욕에 있는 시간 동안 친구들과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하는 편이다. 모여서 파티도 하지만, 현악사중주 악보를 쌓아놓고 함께 악보를 읽어 내려가는 시간도 즐겁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요리에 재미를 붙였다. 특히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이 정말 즐겁다. 사실 2년 전만 하더라도 주방 근처에 얼씬도 안할 정도로 요리에는 관심조차 없었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내 모습이 상상이 잘 안간다. 어제는 떡국을 해먹었고, 오늘은 집에 돌아가서 파스타를 해먹을 생각이다. (웃음)

 

그럼 반대로 싫어하는 건?

얼마 전 다른 인터뷰에서도 이야기 한 적이 있는데, 수압이 낮은 것이 싫다. 이유를 설명하긴 어렵지만 수압이 낮은 곳에서는 샤워할 맛이 안난다. (웃음) 수압 이야기를 꺼내긴 했지만 연주를 다닐 때마다 작고 사소한 것들로 배려받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곳은 또 찾고 싶어진다. 한국이 그렇다. 일년에 두 번 정도 가는 편인데 매번  기대되는 곳이다. 특히 한국 호텔의 수압이 세서 아주 맘에 든다. (웃음)

 

요즘 콩쿠르에서 입상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콩쿠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장단점을 모두 이야기 해볼 수 있지만, 나는 좋은 면을 더 보고 있는 편이다. 입상자가 얻는 명성도 중요하고 부상으로 따라오는 연주 기회들도 빼놓을 수 없다. 요즘에는 일정기간 좋은 악기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곳도 있고 매니지먼트와 계약로 연결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연주자에게 목표를 가지고 음악을 준비할 수 있게 한다는 장점도 있다.

 

정작 콩쿠르 경험이 전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콩쿠르를 “기회찾기”라는 측면으로 본다면 그런 도전 없이 다양한 연주 기회를 가졌던 나는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함께 일하고 있는 매니지먼트인 오퍼스3(Opus3)와 첫 인연을 맺은게 16살때 였으니까…

 

그렇다면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커리어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나는 프로 음악세계가 어떤 곳인지 아무 것도 몰랐고 매니저도 없는 아주 평범한 학생이었다. 오늘날의 보스턴은 훌륭한 교수진들과 재능있는 학생들이 많지만, 내가 바이올린을 열심히 배우고 있을 당시만 하더라도 모든게 뉴욕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최고의 학생들은 모두 줄리어드 연습실에 있다고 말할 정도였는데, 당시 나는 보스턴에서 나름 촉망받는 어린 바이올리니스트 중 하나였다. 

당시 보스턴 심포니와 로베르토 아바도의 지휘로 협연하기로 했던 알프레드 브렌델이 연주를 취소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시벨리우스 협주곡을 들고 협연자 오디션에 지원했다. 그리고 얼마 후 집 전화 음성메시지에 보스턴 심포니와 협연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아바도는 같은 해 시카고 심포니의 협연자로 나를 초대하면서 하루 아침에 보스턴과 시카고 심포니와 연주를 할 수 있었다. 이후 보스턴에서 독주회가 있었는데 지금의 매니지먼트사에서 내 음악회에 찾아와 함께 일해볼 것을 제안했다. 물론 대답은 예스였다. 이 모든 일이 16살때 일어난 일이다. 

 

지금 관심을 가지고 있는 프로젝트 같은 것이 있다면?

사람들은 흔히 큰 대회에서 입상을 하거나 유명 악단과 연주를 하면 뭔가 잘 될거라는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다. 유명 매니지먼트에 소속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런 기회를 잡는 것이 필요하지만 실제로 커리어를 쌓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차근차근”이다. 큰 연주가 아니더라도 자기가 원하는 프로젝트를 개발하고 진행하는 것 역시 반드시 필요하다. 

피아니스트 제레미 덴크(Jeremy Denk)는 2007년부터 거의 매년마다 연주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 그와 함께 찰스 아이브스(Charles Ives)의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을 함께 연주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제레미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고, 아이브스의 소나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연주해 본 경험이 없어서 이 도전이 흥미로울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번에 처음 연주하는 아이브스 소나타와는 반대로, 똑같은 곡을 반복해서 연주해야 하는 경우가 많을텐데 무대에 오르기 전 익숙한 곡에 대한 긴장감을 어떻게 유지하는가?

멘델스존 협주곡 같은 곡은 셀 수 없이 많이 연주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연주할 기회가 많을텐데, 이런 곡일수록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연습하는 편이다. 개인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나같은 경우는 곡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잘 계획한 후 실제 연주에서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형인데, 매 연주마다 그 수준에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만족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같은 곡을 반복해서 연주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이 기준을 떠올린다. 그렇게 되면 곡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긴장감을 놓을 수 없다. 한 번도 만족하지 못한 연주에 어떻게 연습을 게을리 할 수 있겠는가?

 

그 기준이란 절대적인 것을 말하는가?

언젠가 비행기 안에서 크리스찬 테츨라프(Christian Tetzlaff)가 베를린 필하모닉과 연주하는 멘델스존 협주곡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까지 다섯 번을 돌려서 다시 봤다. 말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내가 풀어내는 멘델스존과는 대척점에 놓인 듯한 날것의 야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연주가 내 기준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내 무대 위에서의 경험과 나와는 다른 다양한 연주와의 만남이 쌓이면서 나의 예술세계도 성숙해 갈 것이라고 믿는다.

 

다음 달에 서울시향과 연주를 갖는다. 지휘봉을 잡는 마리오 벤자고와의 특별한 인연이 있다고 들었다.

지휘자 마리오 벤자고와는 2004년 인디애나폴리스 심포니에서 크라이슬러 소품 몇 곡을 함께 연주한 것을 계기로 처음 일하게 되었다. 6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고 2010년에 내쉬빌 심포니와의 연주에서 그와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이후 그가 다섯 번씩이나 자신의 연주에 독주자로 초청해 줬다. 지금은 거의 매년 그와 연주를 갖는 편이고 이번 서울 연주 역시 그의 초청으로 이루어졌다. 스무 살 때 서울시향과 첫 연주를 하고 이번이 두 번째라 기대가 더 크다. 음악회에서 많은 분들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가 소위 ‘엄친아’이기 때문이거나 기획사의 마케팅으로 탄생한 반짝 스타로만 여겨지는 것은 아닐지 안타까운 생각이 들때도 있다. 사람들이 엄친아라는 안경을 쓰는 순간 그는 ‘바이올린도 잘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어쩌면 그에게 있어서 이 운명적 꼬리표가 가장 큰 적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이 안경을 즐겨 쓰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바이올린이 ‘덤’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인생의 전부이다. 

워싱턴포스트는 그의 연주를 가리켜 아이작 스턴과 이츠하크 펄만의 젋은 시절에 비유했다. 그는 칭찬에는 고맙지만 그들의 연주 스타일과는 전혀 다르지 않냐며 필자의 생각은 어떤지 되물었다. 그는 커리어가 막 시작되었을 당시만 하더라도 닮고 싶은 바이올리니스트가 있었지만 시간이 흘러 서른이 넘어가고 최근 어려운 시기를 지나가면서 생각이 여유로워지는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푸릇푸릇한 시기를 지나가는 젊은 연주자에게 생각과 경험이 익어간다는 것만큼 좋은 신호는 없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는 음악을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가 되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마음 한켠에 남겨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