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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 혹은 암보?

이곳은 유럽의 한 오페라 극장. 발자국 소리와 함께 지휘자가 등장하자 음악회장 전체로 박수 소리가 퍼졌다. E플랫 장조의 힘찬 코드로 시작되는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The Magic Flute)”의 막이 올랐다. 지휘자가 능숙하게 이끄는 서곡의 친숙한 폭풍이 몰아쳤고 오케스트라의 독무대가 지나가자 환호가 터져 나왔다. 관객들의 박수가 잦아들 무렵 어둑한 무대에 타미노 왕자가 달려 나왔다. 지휘자는 그제서야 한 손으로 악보를 펼치며 3시간의 공연에 본격적인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그런데 고개를 숙여 펼친 악보를 보니 마술피리가 아닌, 모차르트의 또 다른 명작 “코지 판 투테(Così fan tutte)”가 아닌가? 순간 식은 땀이 흘렀다. 오전에 다른 캐스팅과 연습했던 악보였는데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가방에서 꺼내 그대로 무대에 오른 것이 화근이었다. 마술피리만 수 십번 무대에 올렸던 베테랑 지휘자였지만 혹시 순서를 혼동하거나 가수들에게 잘못된 사인을 주면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 에피소드는 필자가 유학시절 담당교수가 실제로 겪었던 이야기다. 천만다행으로 아무 사고 없이 공연은 잘 마쳤지만 그 순간 느꼈던 아득함이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전 세계 오페라 극장의 단골 지휘자로 활약하며 지휘해보지 않은 작품이 없을 정도로 뼛속까지 오페라 지휘자였던 그는 이 일화를 소개하며 악보의 중요성을 힘주어 강조했다. 무대에 오르기 전 악보를 철두철미하게 공부해야 함은 물론, 연주할 때 역시 악보를 앞에 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연주 시간만 한 시간 넘는 곡들이 깔려있고, 오페라까지 합치면 대여섯 시간을 넘어가는 곡도 수두룩한데, 자신을 과신하여 괜히 어설프게 악보 없이 연주하다가 낭패보는 일이 종종 생기기 때문이다.

오페라 가수들의 경우는 연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악보를 외워하는 것이 필수이고, 협주곡(concerto)을 연주하는 독주자들도 대개 외워서 무대에 서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소나타(sonata)의 경우는 피아니스트와 독주자가 모두 악보를 사용한다. 왜냐하면 소나타는 피아노를 독주자를 위한 “반주”의 의미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입장에서 연주하는 독립된 개체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나타는 독주와 반주가 아니라 둘 사이의 실내악(chamber music) 연주이므로 각 연주자들이 악보를 사용해서 연주하는 관습을 지킨다.  

타계한 명 지휘자들 가운데 푸르트 뱅글러(Furtwängler)나 로린 마젤(Lorin Maazel)같은 인물들은 암보로 지휘하는데 도가 튼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소위 “포토그래픽 메모리(photographic memory)”라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구조 분석이나 흐름을 통해 악곡을 익히고 외우는 것이 아니라, 악보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사진찍듯 통째로 입력시켜 외워버리는 능력이다. 이런 사람들은 리허설 도중에 끊고 연주자들에게 필요한 주문을 한 다음, 어디서 다시 시작할지 악보를 뒤질 필요가 없다. 이미 사진 찍어둔 이미지가 머릿 속에 차곡차곡 들어있기 때문이다. 지휘자들 중에는 악보를 익히는 고통을 호소하며 이런 유별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최근 필자는 피터 와일리(Peter Wiley)라는 베테랑 첼리스트와 함께 슈만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했다. 그는 수 없이 많은 무대 경험을 가진 연주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연주 직전까지 악보 사용여부를 고민했다. 연주 전 두 차례의 리허설에서 그는 악보를 사용하지 않았다. 작은 접이식 보면대에 악보를 올려 둔 채 무대에 서긴 했지만 정작 연주가 시작되자 그는 악보를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연주를 펼쳐나갔고 청중들과 함께 무대를 꾸며나갔던 동료 음악가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그는 악보가 필요 없었다. 다만 “혹시”를 대비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악보와 함께 무대에 오르는 거장들이 수두룩한 것을 보면 암보는 그 자체로 별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악곡의 충분한 연구는 음악가들에게 있어서 운명이지만 그렇다고 외워서 하는 연주가 더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은 사실이 아니다. 음악가에게 있어서 악보는 예술적 영감의 근원인 동시에 무대 위에서 벌어질 수 있을 안전사고를 대비하는 가장 확실한 보험이자, 무대를 찾은 관객과 동료 음악가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