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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리본의 기적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자신을 증명한 선수에 대해 묻는다면 자신이 개발한 최고의 기술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양학선 선수라고 답할 것이다. 전문가들이 그의 금메달을 예측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사실 대다수의 국민들은 ‘도마’라는 비인기 종목의 양학선 선수에 대해 큰 관심을 두고 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남자 체조의 역사를 바꾼 놀라운 기량으로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된 한 청년의 화려함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어려운 집안 사정이 언론을 통해 전해지면서 사람들의 관심과 후원이 줄을 이었다. 금메달의 감격만큼이나 그가 걸어온 드라마틱한 삶이 또 다른 감동이 되었기 때문이다. 

양학선 선수와 더불어 리듬체조 부문에서 동양인으로 유일하게 결선까지 진출하여 종합 5위라는 기적적인 성적을 거둔 손연재 선수 역시 ‘설마’를 ‘현실’로 바꾼 주인공이 되었다. 한국인 선수가 리듬체조 종목에서 활약을 할 것이라고 그 누가 상상했었던가? 마치 김연아 선수의 등장 이전 피겨 스케이팅 종목이 그저 외국 선수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것처럼 말이다. 런던의 웸블리 아레나에서 펼쳐진 올림픽 결선 마지막 종목인 리본 경기에서 손연재 선수는 그녀가 사용했던 리본의 빨간색만큼이나 깊고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메달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국민들에게 이에 버금가는 감동을 안기는 작은 기적을 일궈냈다. 손연재 선수는 수많은 열성팬들의 열렬한 지지와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는 인물이 되었다. 

런던 올림픽에서 빨간 리본으로 기적과도 같은 환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손연재 선수의 연기를 보면서 떠올랐던 인물이 있었다. 바로 피아니스트 L이다. L은 대학 재학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던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특유의 끼와 성실함으로 기대를 모았던 그녀는 당시 지도교수는 물론 다른 동료로부터도 신뢰를 한 몸에 받았다. 예술계 고등학교 입학부터 대학 졸업까지 수석자리를 양보한 적이 없었던 지독하게 성실했던 피아니스트였다. 학기 중은 물론 방학기간에도 쉬지 않고 많은 시간을 연습에 투자했다. 그리고 그녀의 재능과 피나는 노력의 결과는 콩쿨입상 등과 같은 다양한 모습으로 증명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그녀와 관련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그렇게 성실하게 자신을 갈고 닦는 그녀의 지도교수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지도교수는 방학 기간 동안 적지 않은 금액의 수업료를 받으며 L을 가르친다는 것인데, 그녀는 지도교수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꼬박꼬박 레슨을 받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엄밀히 따진다면 학기가 아닌 방학 기간 동안에 이루어지는 과외 수업인만큼 별도의 수업료를 지불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20여년 전의 한국 상황에서는 본인의 지도교수에게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가면서까지 방학시간까지 레슨을 받는 것은 흔한 경우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음악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경우는 대개 방학 기간 동안 국내외 음악캠프 등에 참석하여 학교에서 접하지 못한 새로운 환경에서 다양한 선생님들과 동료들과의 네트워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고,오디션을 통해 장학금을 지급하여 우수한 학생들의 참여를 장려하는 페스티벌도 많았기 때문이다. 수업이 없는 방학기간을 이용해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수 개월 가량 학교를 벗어나 다양한 음악가들로부터 지도를 받으면서 음악회도 참관하고, 크고 작은 연주 기회를 갖는 것을 통해 여러 가지 경험을 할 수 있다. 많은 경우 이런 기회를 통해 평소 동경하는 음악가들과의 만남이 성사되기도 하고, 다른 선생님과 연결되어 유학지나 상급학교가 결정되기도 한다. 

방학기간을 이용해 에누리 없이 꼬박꼬박 부수입을 챙기는 L의 지도교수를 곱게보지 않는 시선이 하나 둘씩 늘어가면서 그 교수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공의 적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L과 그녀의 지도교수는 방학기간 동안 특별한 만남을 계속 이어갔다.

세월은 흐르고 L은 어느덧 졸업을 앞두게 되었다. 그녀는 곧 떠나게 될 독일 유학 전 마지막 인사를 위해 학교를 찾았다. 지난 4년을 떠올리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지도교수는 연구실 책상에서 빨강 리본으로 묶여있는 꾸러미 하나를 꺼냈다.

“너 이 꾸러미가 뭔지 아니? 이건 네가 지금까지 방학마다 내게 가지고 왔던 레슨비가 들어있는 봉투들이야. 너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내가 모아뒀단다. 이 작은 선물이 네 유학 자금으로 잘 쓰여졌으면 좋겠구나. 지금까지 열심히 따라와줘서 고맙다.” 

L의 지도교수는 이 때를 위해 방학기간 동안에도 에누리 없이 수업료를 보관해왔다. 자칫 집중이 흐트러 질 수 있을 수 있을 방학기간 동안에도 피아노에 매진할 수 있도록 L를 격려하여 정기적인 레슨을 받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한 번의 레슨이 얼마나 가치있는 것임을 진지하게 직면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공공의 적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장차 L이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될 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또다른 빨간 리본의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